시 - 필사

죽지 않는 시인들의 사회 / 김이듬

칠부능선 2019. 11. 9. 21:35

죽지 않는 시인들의 사회

김이듬

 

 

그들은 둘러앉아 잡담을 했다

담배를 피울 때나 뒤통수를 긁을 때도 그들은 시적이었고

박수를 칠 때도 박자를 맞췄다

수상작에 대한 논란은 애초부터 없었고

술자리에서 사고 치지 않았으며

요절한 시인들을 따라가지 않는 이유들이 분명했다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연애 사건도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죽어버릴 테다

이 문장을 애용하던 그는

외국으로 나다니더니

여행책자를 출간해 한턱 쏘았다 난 안 취할 만큼 마셨다

중요한 건 그 자리에 빠진 이들

그 시인들은 제 밥그릇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지

신촌의 작업실에서 애들이 기어다니는 방구석에서

날이 밝아올 때까지 하찮아지고 있는지

뭔가 놀라운 한 줄이 흘러나오고 손끝에서

줄기와 꽃봉오리가 환해지는지

중요한 건 그런 게 없다는 것

아무도 안 죽고 난 애도의 시도 쓸 수 없고

수술을 받으며 우리들은 오래 살 것이다

연애는 없고 사랑만 있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

조용히 그리고 매우 빠르게

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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