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딜리아니 <어깨를 드러낸 잔느> |
그에게 그것은 ‘영혼’…정직이었을까 나약이었을까
연인이자 동료인 14살 연하 잔느, 죽음까지 동행
경기도 일산 아람미술관에서 <열정, 천재를 그리다>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행복하고 슬픈 사랑전이 열리고 있다. 3월 16일까지다. 사슴처럼 목이 긴 여인을 그린 모딜리아니는 기억하지만 에뷔테른이란 이름은 생소하기만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잔느 에뷔테른이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0년이 채 안된다. 잔느는 모딜리아니의 연인이다. 그것도 보통의 연인이 아니라 18살에 열네살 연상인 32살의 모딜리아니를 만나 사랑한 연인이자 모델이자 모디의 마지막 생애 3년 동안 불꽃같은 예술샘이 쏟게 한 마중물이었다. 3년 뒤 모딜리아니가 죽음을 맞이할 때 잔느는 ‘모디’와의 사이에 낳은 한 아이 말고도 뱃속에 8개월 된 아이를 갖고 있었다. (‘모디’는 친구들이 불려준 별칭. ‘저주 받은 화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18살에 만나 마지막 3년 예술혼 ‘마중물’…이틀만에 투신으로 뒤따라
잔느는 모디가 병원에 실려가 사망한 지 이틀만에 친정 아파트 6층 창문에 몸을 던져 자살해 모디의 뒤를 따랐다. 그의 나이 불과 스물두살 때였다. 무명에다 낭인이나 다름 없는 모디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엿한 집안에서 자란 잔느가 그렇게 자살하자 충격에 휩싸인 잔느의 가족들은 모디를 원망하면서 둘의 시신이 함께 묻히는 것도 반대했다. 수많은 모디의 지인들의 요청으로 10년 뒤 둘은 나란히 묻힐 수 있었지만 잔느의 가족들은 여전히 둘의 관계를 부인해 왔다. 그러다 10년 전쯤에서야 잔느의 가족들이 모디의 작품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역력히 드러나는 잔느의 작품들을 세상에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열정이 천재성 갉아먹어 늘 술과 여자에 빠진 중독자
이번 전시회가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은 모디와 잔느의 사랑을 담은 기획전인 때문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비롯한 숱한 비극적인 사랑은 늘 이루어진 사랑보다 못이루어진 사랑이 더욱 많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향수가 더욱 많은 인간들에겐 애틋한 마음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모딜리아니(왼쪽)와 잔느 |
우리에게도 이뤄지지 않은 사랑의 비원을 안고 현해탄에 몸을 던진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이 있었다. 모디와 잔느가 죽은 지 6년 뒤 윤심덕은 일본에서 귀국하던 배에서 유부남과 못이룬 사랑을 괴로워하며 연인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
모디는 천재성과 열정을 지닌 화가였지만, 늘 술과 여자를 떠나지 못한 중독자나 다름 없었다. 현대 미술에서 모디는 천재화가로 그려지며, 잔느는 그에 딸린 주변 가십 정도일 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화가보다 적은 70여점의 작품밖에 남기지 않은, 그것도 잔느와 만난 3년 동안 그려낸 그의 작품들은 잔느가 없었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잔느에게 천재화가 모디는 연인이자 우상이자 신이기도 했지만, 잔느는 늘 방황하는 모디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관계’란 나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나이와 차이는 관념 속에만 존재할 뿐.
그 연약함까지 사랑했기에 가슴을 칼로 찌른 자화상 그린 잔느
잔느 <자살> |
잔느는 모디의 천재성 뿐만 아니라 모디의 연약함까지 사랑했고, 그의 모성 안에서도 아기처럼 잠들지 못하는 모디를 바라보면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모디가 생활고를 해결할 어떤 활로를 찾기는 커녕 다시 방탕한 삶에 젖어 자신을 죽여가고 있을 때 잔느는 죽음을 직감할 수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 가운데 자신의 가슴을 칼로 찔러 가슴에 피를 솟은 채 누워 있는 자화상이 있다.
왜 극약을 먹거나 동맥을 자르거나 목을 매지 않고 자신의 가슴을 찌른 것일까. 지식은 머리에서 살지만 사랑과 기쁨과 슬픔은 머리에 머물지 않는다. 신(神)이 머무는 곳 또한 가슴이다. 신이 자신과 타인에 대해 한없는 연민을 내뿜고 있는 자비와 비탄의 바다도 가슴이다. 모디를 바라보면서 그의 가슴이 그렇게 찢어진 것이다.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당신의 눈동자를 그리게 될 것”
모디의 그림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대부분의 그림에 눈동자가 없다는 것이다. 눈동자가 없는 인간의 형상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해골이다. 즉 죽음이다. 모디는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을까. 모디의 모델이 되어준 잔느가 모디에게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느냐”고 묻자, 모디는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당신의 눈동자를 그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눈은 영혼의 창이다. 뇌 가운데 밖으로 드러난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모디의 모습에서 상반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상대를 알지 못한 채 상대를 그릴 수 없는 모디의 정직성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의 눈동자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그의 나약함과 소극성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눈동자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변화무쌍한 마음의 스크린이다. 눈동자는 우리 몸의 다른 부위가 동작하기 전 늘 예고편을 내보이고 있다. 입이 말하기 전에 눈동자는 이미 앞서 말한다. 그곳은 고통과 슬픔, 기쁨과 환희가 넘실대는 마음의 바다를 보여주고 있다. 그 눈동자를 바라보기 위해선 용기와 함께 상대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 연민이 필요하다.
모딜리아니 <모자를 쓴 잔느> |
눈동자에 담긴 마음이 고통이자 환희라는 걸 몰랐을까
모디는 그 시대 화가들이 으레 그렇듯 창녀들을 모델로 활용했다. 모디는 창녀를 하룻밤 상대로도 활용했는데 ‘원 나잇 파트너’의 눈동자는 거의 그리지 않았다. 하지만 창녀들이라고 희로애락애오욕이 없을 것인가. 또한 ‘마음 세상’에서 어찌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을 수 없다는 말인가. 모디가 그들의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것은 그들의 얼굴에 신문지를 덮은 채 섹스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그처럼 상대와 단절된, 그런 그림은 모디 죽음의 예고편이 아니었을까. 상대의 고통을 송두리째 들여다보는 것은 잔느가 그랬듯이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긴 하지만, 만약 상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하나의 기쁨도 없다는 것을 모디는 몰랐던 것일까. 세상의 얘기들이 자기 안에서만이 아니라 서로 바라보는 눈동자의 ‘관계’ 속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이 고통과 환희의 바다를 헤엄치는 것이 마음의 운명이며, 육체의 죽음이 결코 그런 마음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모디는 이제는 알았을까. 눈동자에 담긴 이 마음이 바로 고(苦)이며, 또한 환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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