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었으므로, 진다 / 이산하
이산하 시인의 산사기행이다.
멀리 떠나지 못하는 요즘 딱 맞는 책이다. 내가 가 본 절과 가보지 못한 절을 그려보며, 시인의 사유를 따라간다.
산사의 풍경소리와 처연하게 고운 꽃잎들도 활짝 피었겠지. 가끔 침묵에 빠져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요즘 널널해진 이 시간을 만끽한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몸 부리는 일을 안하고 살았는지... 친구의 화원에 다녀온 날은 완전 떡실신을 한다.
화분에 풀을 뽑고, 화분을 이리저리 나르고, 바닥에 흙 속으로 뿌리내린 몇몇을 끌어당기고 나니 어깨가 뻐근하다.
스님들도 텃밭을 가꿔서 자급자족한다. 울력이라고 하던가. 노동은 생각의 공간을 만든다.
미황사부터 '팽목항법당'까지의 순례길에서 나는 속 깊은 한 사내와 그의 올곧은 정신과 고집스러운 순수성... 이런 것들을 만났다.
절마다 품은 설화는 절묘하고도 애절하다.
통도사의 용학스님은 자신이 죽는 날을 부처님 돌아가신 80세, 2월 보름으로 정하고 그 날 저녁,
열반종 타종을 한 후, "나 지금부터 죽겠소. 여러 불자님네들 그동안 신세 많이 지고 갑니다." 짧은 인사후 열반에 들었단다.
이건 설화나 전설이 아니고 현실이다.
오래 전, 그 통도사에서 지인들과 '탬플스테이'를 하면서 천방지축 놀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의 경거망동마저 그립다.
그러고 보니 나도 절마다 추억 서린 곳이 많네.
*완벽한 세계를 완성으로 보지 않고 '인간적인 것'을 완성으로 보는 인디언의 통찰, 처음부터 인디언에게는 완벽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완벽할 뿐이었다. 상처와 결핍을 인간의 완성을 위한 존재로 보는 인디언의 영혼, 이 세계는 인디언 목걸이들처럼
... 그 이후 내 영혼은 남루했고 자지러진 영혼은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42쪽)
* 선운사란 절은 왠지 갈 때마다 다른 절과는 다르게 마치 감자 삶아 소풍가듯 언제나 부담이 없어서 좋다.
... 이제 선운사에서 붉은 동백꽃이 상징처럼 된 이유들이 어렴풋이나마 드러나는 듯하다. 그것들 가운데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동백꽃처럼 떨어진 동학군들의 비장한 최후가 아닌가 싶다. ...
무엇보다도 동백꽃으로 하여금 원래 제 떨어지는 고유의 속도를 찾아주어야 한다. 동백꽃은 다만 피었으므로 진다. (218쪽)
* 상징을 넓이로 키우는 것은 부처의 뜻이지만, 상징을 높이로 키우는 것은 사람의 뜻이다. 사람의 뜻은 한없이 높아지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그 욕망은 그러나, 외롭고 쓸쓸하다. (259쪽)
중간중간 이런 시원한 사진이 있다. 생각의 싹을 틔울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