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오늘> 엔솔로지
글밭에서의 20여년 시간을 돌아보는 기회다.
처음 인터뷰 질문지를 받았을때는 고민했는데, 질문자가 내 책 네 권을 읽은 흔적이 보여서
수락을 했다.
남길 것 없이 말끔하게 가겠다고 했는데 뭔 흔적이 이리 많은지... .
나 - 확실히 푼수가 다 되었다. 칠렐레팔렐레 속곳까지 펄럭이고 있다.
크고 두꺼운 책에는 다양한 읽을거리가 있다.
특집1 : 문학의 정수를 논하다
마신의 아내의 사랑법 - 임헌영
기억과 성찰의 결속으로서의 서정 - 유성호
편자의 노래 - 류미야
특집2 : 문학의 재미를 논하다
아무리 쓰고 고치고 져미고 붙여봐도 여직 미완인 것을 - 이경철
말놀이의 즐거움 - 오봉옥
노정숙 수필가를 만나다
장지욱
장지욱(이하 장) - 안녕하십니까? 글을 쓰고 있는 장지욱입니다. 시인이자 수필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근황은 어떠신지요?
노정숙(이하 노) - 10여 년 전부터 「현대수필」편집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겨울호 청탁을 끝내고 잠시 여유로운 시간입니다. 문우들과 태백산 천제단을 겨우 오르고 왔습니다. 몸의 비명을 들으며 평소에 단련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네요. 그리고 성남문화예술비평지 「창」 6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성남시의 기금으로 시의 문화행정을 비평하는 건, 나름대로 보람된 작업이지요. 변화를 기대하는 것도 설레는 일이고요.
장 - 벌써 작가가 되신지 17년이 지났습니다. 등단하실 때와 지금의 작품세계는 어떤 차이가 있으십니까?
노 - 등단할 때와 지금의 작품세계의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굳이 차이를 든다면 글이 짧아졌다는 것이에요. 어쩌면 형식에서 자유로워진 것이지요. 초기에는 정색하고 썼다면 지금은 힘을 빼고 재미를 생각하고 부드럽게 쓰려고 애씁니다.
장 - 선생님은 “사람이 좋아서 시와 수필 밭에서 함께 놀고 있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어떻게 놀고(어울려)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시와 수필 모두 동인활동을 하고 계시다 들었는데요?
노 - 시인회의 동인들과는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번 만나 합평 하고 식사를 하며 변함없는 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 동인들과 합동 시집을 14권 만들었습니다. 분당수필 동인들과는 매주 만나 강의를 듣고, 식사하고 문학토론을 합니다. 서로 격려하며 매년 동인지를 냅니다. 작년에 18집을 냈지요. 그 중 소그룹은 주기적으로 국내외여행을 함께 하며 돈독히 지내고 있습니다. 성남시에서 열리는 문학행사를 시와 수필 동인들과 함께 만나는 자리로 만들어 즐기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글을 매개로 만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잘 놀고 있습니다.
장 - 선생님은 제1 에세이집 『흐름』에서 “치열하지 못한 삶에 대한 반성과 답답함”을 풀겠다고 하셨는데 어떤 삶에 대한 반성과 답답함이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노 - 사실은 치열하지 못한 삶이란 없지요. 아무 일 없이 살아내는 일 자체가 치열한 것이기도 하지요. 그때의 제 삶에 대한 반성과 답답함이란 주변인으로의 삶에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이었지요. 이미 며느리, 아내, 엄마로서의 자리는 굳어있으나, ‘노정숙’이란 존재는 미미했지요. 첫 책을 묶으면서 내 의지와 사회성, 가치관이 정리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만든 질료가 가족과 친구, 지인들이란 것도 깨달았네요.
장 - 제2에세이집 『사막에서는 바람이 보인다』에서는 “서로 불화하면서도 살 수 밖에 없는 이 땅에서 희망”을 얻으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촛불과 태극기로 나눠진, 세대 간의 불신의 시대에 희망은 무엇일까요.
노 - 저도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갔습니다. 극과 극에 선 마음을 비라보는 것만으로도 힘겨웠지요. 불신을 믿음으로 불통을 소통으로 바꾸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희망이지요. 어느 쪽이든 신념은 쉽게 바뀌지 않아서 불화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지만, 더 나은 쪽으로 변화하는데 저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를 거울삼아, 시대의 아픔을 동감하는 깨어있는 사람이고자 합니다.
장 - 제3에세이집 『바람, 바람』에서 선생님의 아포리즘이 완성되어 간다고들 평자들이 평을 하던데 아포리즘이란 무엇이고, 왜 아포리즘 수필을 추구하는지, 그리고 특별히 바람이라는 소재를 제목으로 삼은 이유도 궁금합니다.
노 - 아포리즘은 금언, 경구, 잠언처럼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간결하게 압축한 짧은 글입니다. 시와 수필을 함께 했기 때문에 나온 형식인데, 아포리즘의 완성이라는 건 황송한 말씀이지요. 산문시의 형식으로 수필을 전했다고 할까요. 독자들의 반응이 좋은 것에 감사합니다. ‘바람, 바람’은 쳅터의 소제목인데 출판사에서 제목으로 추천했지요.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바람, 무언가 원하는 바람 - 중의적 바람은 제 에세이 전체를 받치고 있는 정신이기도 합니다.
장 - 선생님은 첫 에세이집『흐름』부터 제 4에세이집 『한눈팔기』까지 출판 하셨는데 작은 에피소드나 소감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노 - 저는 책을 만들려고 일부러 글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쓴 글들이 모이면 그것을 한 곳에 묶는 의미지요. 첫 에세이 『흐름』은 사회적 관심을 나타낸 작품이 많고, 두 번째 『사막에서는 바람이 보인다』는 부드럽게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화가인 친구 자임이 제 글에 그림을 그려줬습니다. 쉽고 재미있게 읽히기 위해 다양하게 정성을 쏟았지요. 출간 후에 책에 실은 그림과 책을 청담동 ‘가산 겔러리’에서 초대전를 해줘서 책과 그림을 팔며 잘 놀았습니다.
장 - 특히 『한눈팔기』에서 “바라보기는 열망이다. 바라보다 지치면 한눈팔기를 한다. 한눈팔기는 모색이다. 이내 모든 것을 아우르게 되지만 끊임없이 나를 벼린다. 바람 넣기로 굳어지지 않으려 애쓴다. 세찬 바람 속에서 비상하는 바람을 품는다.” 라고 인생의 깊은 사색이 묻어나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이 글의 배경이나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노 - 수필은 쓰면 쓸수록 어려운 장르입니다. 좋은 글에 대한 갈증으로 끊임없어 각성하며 독서와 여행으로 다그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한눈팔기’라는 여유를 부리기로 했습니다. 즐기는 것이 잘 사는 것, 잘 노는 것이 남는 것이라며 스스로 세뇌하지요. 이 후에는 여행을 해도 독서를 해도 즐거운 것만 생각합니다. 남길 것을 메모하지 않고 마음이 뜨거웠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생각은 길게 하되 각성은 짧게 하려고 합니다.
제가 하는 ‘한눈팔기’가 나 자신과 세상을 향한 ‘직시’가 되는 욕망을 품고 있습니다.
장 - 선생님의 수필은 수사법에서도 남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을 채소밭으로, 폐경을 완경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술과 글을 대비하는 경우, 술과 글은 마음을 푸는 도구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쓴 수필로 서사와 서정이 있는 글들이 많은데요. 글을 쓰시면서 이런 점들을 고려해서 쓰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노 - 수필은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고 진실의 구현입니다. 전하고 싶은 추억이나 사건에 공감을 얻으려면 문학적 수사법이 필요합니다. 사안에 맞게 서사와 서정을 선택해서 써야 하지요. 진중한 주제일수록 가볍고 재미있게 풀어내려고 노력합니다. 술과 글은 제가 가지고 노는 것들이니 서로 버무려봤는데 공통점이 많더군요. 오래 생각하고 쓰지만, 쓰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수필은 인간학이라고 하나 봅니다. 글을 쓰면서 아프거나 슬픈 것마저 재산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 순간순간이 모여 한 줄의 글이 되지요. 제가 쓴 글을 돌아보면 미숙한 건 많을지라도 허투루 쓴 건 없습니다.
장 - 선생님의 글을 보면 유독 노인과 미래의 초상화에 대한 글이 눈에 뜨입니다. 「나를 받아주세요」에서는 죽음에 대한 달관의 모습도 보여 주고 계십니다. 행복한 노년에 대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노 - 노인은 나의 미래입니다. 늦둥이로 태어나서 엄마는 제가 철들기도 전에 거의 할머니였지요. 결혼하고도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고, 그때는 시할머니도 계셨네요. 그래서일까요, 일찍 노인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민 것 같아요. 행복한 노년은 내 몸을 내가 부릴 수 있는 맑은 정신일 때까지만 사는 것이지요. 물론 뜻대로 되는 게 아니지만 끊임없이 소원하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나름의 준비로 시신기증서와 사전의료의향서를 써 두었지요. 언제든 단방에 세상을 떠나는 것이 제가 바라는 행복한 죽음입니다.
장 - 선생님은 그동안 한국산문작가상, 구름카페문학상, 2013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 선정 작가 등 많은 성과를 내신 바 있는데, 작가로서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은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노 - 상을 타는 건 감사하면서도 면구스러운 일이에요. 오랜 시간 한 우물을 파서 얻은 개근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저를 자주 일깨웁니다. 2013년 우수문학도서 선정은 기뻤습니다. 혹시 책이 안 팔려서 출판사에 손해를 끼칠까봐 걱정했거든요. 책을 내 준 출판사에 감사해요.
제 고민은 새로운 글을 잘 읽히게 쓰는 겁니다. 나와 우리, 사회현상에 대한 객관적 시각과 새뜻한 수사를 늘 고민합니다.
장 - 끝으로 선생님의 ‘바람’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궁금한데요, 향후 어떤 작품들을 쓰고 싶으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노 - 사람과 자연에 눈 맞추며 ‘가볍고 재미있게’ 쓰는 게 목표입니다. 빚지고 있는 사회 저변에 대한 간곡한 마음도 풀어내고 싶습니다. 쓰지 않고 못 베길 절실한 마음이 자주 일어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