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오지않는 저녁>
벤쿠버에서 강은소 시인이 왔다. 평문을 쓴 권영옥 시인도 함께.
권박의 강의는 지식축적을 확실히 보여주었지만 수필가들한테 시를 더 어렵게 인식시키지 않았을까 저어되었다.
노력하는 이는 아무도 못 따라간다는 말을 실감하다.
뜻을 이룬 이는 여유롭고 아름답다.
회원들과 함게 밥과 차를 한 자리에서 끝냈다. 벤쿠버 문인협회의 활발한 소식도 듣고...
이들은 친정에 온 듯 하다고 한다.
자주 보든 오랜만에 보든 ... 반가운 인연이다.
몇 년 전 내가 벤쿠버에 갔을 때 한 밤중에 제법 먼 호텔로 차를 몰고 찾아왔었다.
가기 전에 전화하니 대뜸, "저희집에서 묵으세요" 했던 기억도 난다.
오래된 인연으로 두 시인의 시집 <표4>를 거절하지 못했다. 담백하고 솔직하게 쓰려고 노력했는데 민망하다.
윤교수님이 말하는 강은소는 세상이 모두 변해도 요지부동 변함없는 사람이라고 하신다. 동감!
칭찬에 인색한 교수님의 참 묵직한 칭찬이다.
나도 오래전부터 '변함없다'는 말을 제법 들었는데 칭찬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답답하고 지루한 인간이라는 쪽으로 생각되었다.
참 이상하다. 내가 변함없는 건 답답한 일이고, 상대가 변함없는 건 믿음직하다.
<
강은소 시집 표4
말이 여문 강은소는 백합이나 장미가 아닌 마을 어귀를 지키는 느티나무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곁눈 주지 않고 자신이 팔 벌려 만들 수 있는 만큼의 그늘을 펼친다. 그 그늘 아래 금이 간 화분과
남생이무당벌레가 노닐고, 가난하고 쓸쓸한 이들이 살갑게 어울린다. 수줍은 열정과 가슴 서늘한 고백이
휘돌며 바람을 만나 서로 쓰다듬는다.
눈이 깊어 자주 생래의 슬픔에 젖기도 한다. 오래된 풍경 너머를 그리는 눈은 측은지심으로 물기 가득하다.
아슴아슴 흐린 등불이 눈물로 닦여 멀리까지 빛난다. 그 맑고 숫된 눈물에 기꺼운 박수를 보낸다.
노정숙 (시인)
목차 =
제1부
빈집·13
적멸궁 법당에서·14
바람꽃·16
부음·17
저녁 산책·18
강씨 아저씨·20
남천강·22
외갓집·23
질용이 아재·24
들깨 둔덕·26
누구 없소·28
꽃보다 사람·29
백수 탈출기·30
당신의 천국·32
연속극을 보다가·33
튀밥·34
장설(壯雪)·36
제2부
설평선·41
아버지의 베갯잇·42
역으로 가는 길·44
삼월이면·46
나비가 날지 않는 세상·47
사월, 양수리 그리고 노을·48
거미에게로·50
바람이 나를·51
오후의 지붕 아래·52
가을을 위하여·53
단풍 드는 나무·54
물속에는·56
별 하나·58
데미안을 위한 노래·60
낙태일기 4·61
낙태일기 5·62
제3부
꽃과 벌·67
사랑의 무게·68
뿌리·70
나무와 우산·72
봄날의 하관·74
세븐 블루·76
붉은가슴울새·78
봄, 꽃피다·80
붉은 잠·81
오래된 다리·82
스완의 동쪽·83
황폐·84
가든파티·86
저녁이 오면·88
기도·90
무스코시피·92
겨울나무·94
제4부
수타사 은행나무·99
조팝나무·100
함지박·101
족두리풀·102
찔레·104
나팔꽃이 피었네·105
낙태일기 1·106
낙태일기 2·108
십일월·110
예나르·111
운두령·112
달에게·114
오두산 전망대에서·115
향불·116
눈 속 풍경·118
보리차를 끓이며·120
첫눈·122
해설 깊고 푸른 여성성과의 해후/ 권영옥·123
당신이 오지 않는 저녁
둑길을 따라 긴 산책을 나선다
물가에 속삭이는 잡풀과 흰 꽃들
그들의 작은 목소리를 알지 못해도
물 위에 퍼덕이는 백로와
청둥오리의 다정을 흉내낼 수 없어도
마냥 흐르는 물소리가 좋다
막힘 없이 돌아가는 저 몸짓
여울을 훌쩍 흘러가는 넉넉한 소리
노을 속에 붉게 지는 해와
바람에 안기는 산과 구름이 모두
전설이 되고 역사가 되는
흐르는 소리의 은유를 알 것도 같다
그러나 당신은 내게 오지 않고
헤아릴 수 없는 당신의 마음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깊고 또 높아
가슴 위 멍울마다 엉겨 붙은
내 마음의 응어리를 한없이
부끄러워하면서 강둑을 걷는다
당신이 오지 않는 저녁
속을 박박 긁어 파는, 나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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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강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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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오지 않는 저녁>,<복사꽃 그늘에 들다> … 총 2종 (모두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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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만해백일장 대상, 『한민족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강은소 시인이 첫 시집 『당신이 오지 않는 저녁』을 펴냈다.
캐나다 밴쿠버에 살면서도 꾸준하게 시작 활동을 이어온 강은소 시인의 시집을 읽다보면 몇몇 곳에서 한참을 머물게 된다. 그녀가 읽어주는 가족과 사람, 사물의 마음이 눈물겹기 때문이다.
그녀가 회억에 잠겨 그리운 것들을 하나씩 끄집어낼 때 그 현실감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녀가 빚어내는 세계와 인물이 실제보다 더 리얼하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멀리 이국땅에 옮겨진 재스민 화분처럼 꽃을 피우며 한 시절 살다가 “이제 창가에 기대어 앉아/ 혼자 우는 저녁(「빈집」)”을 맞고 있는 강은소 시인. 그녀는 어느 날 자신의 “정원에 까부라”져서 “붉은 가슴 팔딱거리며/ ...... / 무거운 눈까풀속으로 새파랗게 죽어가는 시간과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울새 한 마리(「붉은 가슴울새」)”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본다. 무심코 지나는 길에 밟힌 풀꽃에서도“홍자색 전율에 비틀거리며 다시 살아오르는 혼들의 가뿐 숨결(「족두리풀」)”을 느끼는 시인의 섬세한 감성은 경이롭다.
그러면서 길목에 피어 있는 찔레를 보고 “그리운 가슴마디마다 가시가 되어/ 어릴 적 내 어머니처럼/ 그리움 무성한 세월 속/ 갈무리해 두었던 눈물(「찔레」)”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덧 지천명을 지나 삶의 신산함을 경험하고,“산다는 것은 별빛을 따라/ 모든 버려야 할 것들 다 버리고/ 가볍게 걸어가는 일(「별 하나」)”임을 꼽씹는 강은소 시인은 이제 “가을이 오기 전에/ 새의 깃털처럼 가볍게 날 수 있도록/ 모든 마음의 무거운 것들을/ 비워내고 싶다(「가을을 위하여」)”고 노래하고 있다.
이번 시집을 통해 강은소 시인은 시종일관 담담한 어조로 남성 중심사회를 향해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사회로부터 여성이 겪는 억압에 대한 내용이고. 또 하나는 푸른 그리움에 대한 욕망적인 내용이다.
강은소 시인은 남성 중심사회의 불합리한 구조를 깊이 인식하고 거기에 저항하고자 한다.
“모든 것 다 내주고도/ 아깝지 않은 그리운 사람을 본다(「족두리풀」)”라고 하는 것처럼 화자가 억압받는 여성들을 위해 남성 중심사회에 대한 암유(暗喩)로써 저항의식을 드러냄과 동시에 여성들에 대한 책임의식도 함께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