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상실 수업>

칠부능선 2015. 2. 9. 22:07

 

  *죽음처럼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죽음보다 더 지독한 상태

  이것이 상실의 상태다. 

  오래 전에 엄마를 떠나 보내고도 난 담담했다. 병없이 맑은 정신으로 가신 것에 대해 감사하기까지 했다.

 

 * 최책감이 사라지는 건 슬픔을 치유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 때는 못다한 효도나 도리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을 갖지 않았다. 늘 순간에 최선을 다 한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했다고 자부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참으로 뻔뻔했다.

 

* 더 좋거나 더 나쁜 죽음은 있을 수 없다.

  모든 죽음은 애통하다. 그런데 난 때때로 왜 좋은 죽음이라고 생각했을까.

  모든 죽음은 예정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은 운명이 아닐까. 

 

* 상실이란 '모두 끝났다'의 의미가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의 증거가 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한계, 아니 경계에서 죽은 자는 고통을 말하지 못하지만 산 자는 끊임없이 고통을 말한다.

  아직 살아내야 할 날들은 죄에 대한 보속이다.

 

 * 의학이 치유 보다 경영에 중점을 두는 세상에 속해 있음은 슬픈 일이다.

  그래서 난 병원을 가지 않는다. 중병을 선고 받으면 산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남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지금 생각이다. 여전히 방자한.

 

 * 슬픔에는 경이로운 치유의 힘이 있다.

  외로움을 가지고 논다는 선배 말이 생각난다. 외로움이 깊으면 맑은 슬픔이 될까.

  슬픔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스며드는 것, 아니 푹 빠지는 것, 잠겨드는 것.

 

* 인간의 목적은 사랑하고 사랑받고 성장하는 것.

  그래, 다행이다.

  가엾이 여기고 측은하게 보며 사랑해야지. 사랑을 기다리지 말고 그냥 퍼붓는 것이 낫다. 그걸 언제 기다리겠는가.

  성장은 안 되어도 그만이다.

 

  지구 저쪽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상실을 읽어내는 것도 힘이 든다.

  온갖 황당한 죽음은 남은자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그들이 위로받고 극복하는 계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울어야 한다는데 나는 울지 못했다.  

  죽음은 개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일까.

  호스피스 창안자가 전하는 상실 수업, 미루어 짐작할 뿐, 절절하게 감동하지 못한 게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