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일기>
아끼는 후배가 수필집과 평론집을 냈다.
아이 셋을 데리고 호주에 공부시키려 간 7년 동안의 작업이다.
엄마의 열심한 모습을 보며 아이들은 보나마나 잘 자랐을 것이다.
브리스번에서 책 마무리 작업을 돕던 22살 아들이 하늘나라로 갔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 어찌...
너무도 반듯한 후배의 모습을 떠올리며 뭐라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어떻게... 어떻게...
엄마의 잘못이 아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아들과의 인연이 그것으로 다 한 것이다.
아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것이 다였다.
그대 보다 더 이상 좋은 엄마는 없다.
겨우 이런 위로를 한다. 말이란 이렇게 구차하고 미흡하다.
책 말미에 '무제'라는 제목으로 아들에게 쓴 글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들아,
너만 평안히 안식할 수 있다면
나는 괜찮다
어미 걱정이랑 하지도 마라
아들아, 다정한 나의 아들아'
그래도....
성실한 7년의 결실에 대해 등을 쓸어주고 싶다. 대견하다고.
너무 깔끔한 게 흠인 후배가 책 두 권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바로 주문해서 혹시... 상처에 상처를 더할 내용이 있을까 싶어 얼른 읽어보았다.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다음날 부터 2년간 일기를 썼다.
메모식으로 쪽지에 쓴 글이다.
그 2년 동안 함께 쓴 책이 <밝은 방>이다.
어머니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면서 시작한 사진에 관한 책이다.
어머니를 잃는 건 순리다. 삶의 한 과정이다. 그럼에도
<애도 일기>는 슬픔, 애도... 상실감이 절절하다.
<밝은 방> 바르트 풍의 기호로 푸는 철학적, 적, 적이 많고.. 흐릿한 흑백 사진이 무겁다..
* 나는 언제나 한권의 책을 씀으로써 하나의 작별을 마무리짓곤 했었다. 그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집요함, 은밀함)
바르트가 한 이 말처럼 후배도 혼자만의 자책감을, 슬픔을 풀어내고 담담히 일어서길 빈다.
* 애도의 한도에 대하여 (라루스 백과사전, 메멘토) 어버지 혹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18개월이 넘으면 안된다.
* 이제부터 나는 나 자신의 어머니인 것이다.
집안은 따뜻하고 편안하고 밝고 깨끗하게 정리한다.
*마망을 읽은 뒤부터 여행을 할 때면 늘 맛보았던 자유롭다는 인상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
(잠시 그녀의 곁에서 떠나 있다는 그 자유의 느낌)
*애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선은 급서의 나르시즘이 뒤를 잇는다. 일단은 병으로부터, 간호로부터 벗어나니까.
하지만 그 자유로움은 차츰 빛이 바래고, 절망감이 확산되다가 나르시즘은 사라지고 가엾은 에고이즘,
너그러움이 없어진 에고이즘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녀의 죽음 이후, 그 무언가를 새롭게 꾸미고 만들어 가는 일이 싫다. 그런데 글쓰기는 예외다.
그건 왜 일까. 문학, 그것는 내게 단 하나뿐인 고결한 영역이다.
* 결국 사진 작가는 욕망의 적절한 순간, 즉 카이로스를 찾아낸다.
* 사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존재했던 것을 다만 확실하게 말한다.
...... 어떠한 글도 그 확신을 나에게 줄 수없다. 자기 자신을 인증할 수 없다는 것은 언어의 불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