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150

하늘 요양원

하늘 요양원 노정숙 여름이 오기 전, 터널에 들어갔다 삽시에 아기가 된 노인이 거친 바닥을 드러낸다 아기는 아기가 아니다 통제 불가능한 힘이 솟구친다 아기의 지팡이가 춤을 추면 검은 멍꽃이 퍼진다 흰옷을 입은 처자들은 멍을 어루만지며 통제와 회유를 번갈아 처방한다 까무룩 정신을 놓기도 차리기도 하면서 어둔 터널 속을 걷는다 시간은 한없이 느리게 흐르고 숨이 막혀올 즈음 희미한 빛이 보인다 향기 없는 하얀 꽃무리가 아기를 품는다 어루만지고 쓰다듬는다 악령 든 노인이 슬그머니 사라진다 오소소 소름이 돋고 냉기가 휘감는다 밖은 폭염일 게다 소나기가 올까 아직 출구는 멀다 여름호 (통권 74호)

애도 준비 + 평 (허상문)

애도 준비 노정숙 ‘내 마음은 편안하다.’ 철학자 김진영이 66세로 이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 한 말이다. 그가 평생을 만들고 쌓아온 것들이 모두 정신적인 것이다. 그것이 시험대에 올랐다. 정신력이 무너지는 육신을 보듬고 병 앞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까. 이제 정신적인 것의 역할을 증명해야 한다. 작가는 이렇듯 육체와 정신을 따로 분리해 생각하기도 한다. 유전자병을 앓는 그는 과학은 유전자를 바꾸지 못하지만 정신이 유전자를 바꾼다고 생각했다. 웃음, 유머, 명랑성이라고 부르는 정신의 일 그것은 자긍심이다. 그에게는 유전자병을 짐짓 내려다보는 즐거운 정신이 있다. 2017년 7월 암 선고를 받고 시작한 병원 생활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쓴 13개월의 기록을 읽었다. 환자의 독자성으로 비로소..

모자라고 아픈

모자라고 아픈 노정숙 신부는 신랑이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네! 그렇습니다. 신부는 아직 콩깍지를 쓰고 있군요. 신랑은 신부가 천사라고 생각합니까? 네! 그렇습니다. 신랑도 아직 환상에 빠져 있군요. 두 사람 다 결혼이 처음이니까 그렇죠. 신부, 내 말을 복창하세요. 남자는 모자란 사람이다. 신랑, 복창하세요. 여자는 아픈 사람이다. 조카 결혼식에서 주례는 푼푼한 농담에 이어, 신랑신부에게 난처한 덕담을 한다. 내가 30년을 살고 나서야 터득한 것을 단방에 알려주니 헛웃음이 난다. 몇 해 전부터 젊은이들 중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세대가 늘고 있다. N포세대로 향하는 요즘, 남녀가 결혼식장에 나란히 선 것만도 대견하다. 주례는 이들의 평온한 앞날을 위해 환상을 깨고 연민을 처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