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김지수

칠부능선 2022. 2. 19. 16:16

 71년생 김지수가 88세 이어령 선생님을 매주 화요일 찾아가서 나눈 이야기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죽음 혹은 삶에 대해 묻는 이 애잔한 질문의 아름다운 답이다. 더불어 고백건대 내가 인터뷰어로서 꿀 수 있었던 가장 달콤한 꿈이었다.' 

PS. 선생님은 은유가 가득한 이 유언이 당신이 죽은 후에 전달되길 바라셨지만, 귀한 지혜를 하루라도 빨리 전하고 싶어 자물쇠를 푼다. (감사하게도 그가 맹렬하게 죽음을 말할수록 죽음이 그를 비껴간다고 나는 느꼈다.) '

 

 2005년, 현대수필 특강에 초대해서 가까이서 본 일이 떠오른다. 그 반듯한 용모와 카랑카랑한 음성이 선하다.

"세월 이기는 장사가 없다"는 우리 엄마 말도 떠오르고. 

 선생님은 암에 걸렸는데 전이된 것을 알고 받아들이고 있다. 암, cancer는 라틴 말로 게란 뜻이란다. 몸은 갯벌이 되고 암은 게가 되어서 온 몸을 헤집고 다닌다. 게와 싸우지 않고 같이 살려고, 고통을 겪는 것까지 내 몫이니 관찰하는 것까지 자신의 몫으로 받는다. 

 유난히 포스트잇이 많이 붙여졌다. 부드러운 도끼가 머리를 쿵, 쿵 친다. 울림이 깊다. 

 과하지 않은 감성으로 선생님과 대화를 이어간 김지수,

 구절구절 스윽 스미게 전하는, 김지수의 다른 책이 궁금해진다. 

 

 

 

* 죽음은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내게 덤벼드는 일

- 글로 치면 모든 영역에서 거의 다 백전백승하지 않았습니까?

 "아니라네 난 매번 KO패 당했어. 그래서 또 쓴거지. 완벽해서 이거면 다 됐다. 싶었으면 더 못 썼을 거야. 『갈매기의 꿈』을 쓴 리처드 바크는 갈매기 조나단의 생애를 쓰고 자기 타자기를 바닷속에 던져 넣었다잖나. 그걸로 다 썼다는 거지. 난 그러지 못했네. 내가 계속 쓰는 건 계속 실패했기 때문이야. 정말 마음에 드는 기막힌 작품을 썼다면, 머리 싸매고 다시 책상에 앉았을까 싶어."  (29쪽)

 

* 발톱을 깎다가

  눈물 한 방울

  너 거기 있었구나, 멍든 새끼발가락

 

어떤가?

- 눈물이 납니다

 

 내 작은 잔디밭

 날아온 참새 한 마리

 눈물 한 방울

 

- 왜 매번 눈물 한 방울입니까?

" 늙으면 한 방울 이상의 눈물을 흘릴 수 없다네. 노인은 점점 가벼워져서 많은 것을 담을 수 없어. 눈물도 한 방울이고, 분노도 성냥불 획 긋듯 한 번이야. 그게 늙은이의 슬픔이고 늙은이의 분노야. 엉엉 소리 내 울고 피눈물을 흘리는 것도 행복이라네. 늙은이는 기막힌 비극 앞에서도 딱 눈물 한 방울이야."  (69쪽)

 

* "꿈이라는 건, 빨리 이루고 끝내는 게 아니야. 그걸 지속하는 거야. 꿈 깨면 죽는 거야. 내가 왜 남은 시간을 이렇게 쓰고 있겠나? 죽고 나서도 할 말을 남기는 사람과 죽기 전부터 할 말을 잃은 사람 중 어느 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인가? 유언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거라네.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네."

 - 10년 전에 할 말 다하고 동어반복하는 사람은 유언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죽음 전에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라고, 스승은 일갈했다. 목이 마른지 그가 물을 한잔 들이켰다. 나는 머리통에서 식은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존재했어?'라는 질문만큼이나 '죽음 전에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인중에도 땀이 고였다. 코밑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176쪽)

 

* 인간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없다

 "... 성인군자의 아들도 나쁜 짓을 해. 아버지의 선한 피를 받았는데도 교화가 안 되지. 공자님은 아들을 가르치지 않았어. 가르칠 수 없는 거지. 가장 가까운 피붙이조차 가르칠 수 없어. 결국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엉터리라네. 

 남을 가르칠 수도 없고 남에게 배울 수도 없어. 인간이 그런 존재야. 거기로부터 시작해야 하네. 그게 실존이야. '나는 혼자다'라는 걸 모르는 사람과는 얘기가 통하지 않아. 군중은 남이 이 말 하면 이리로 가고, 남이 저 말하면 저리로 가지. 휩쓸려 다녀. 자기가 없으니까 자꾸 변하는 거라네."

- 자기라는 게 뭔가요?

"자기는 남에게 배울 것도 없고 남을 가르칠 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나'라고 할 수 있지." (235쪽) 

 

* - 젊은이들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는지요?

 "딱 한 가지야.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그리스 사람들은 진실의 반대가 허위가 아니라 망각이라고 했어요. 요즘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잊어서 그래요. 자기가 한 일을 망각의 포장으로 덮으니 어리석어요. 부디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

(316쪽)

 

* 내가 느끼는 죽음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에요. 때가 되었구나. 겨울이 오고 있구나...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침대에서 깨어 눈 맞추던 식구, 정원에 울던 새, 어김없이 피던 꽃들.. 원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 돌려보내요. 한국말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죽는다고 하지 않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 (320쪽)

 

 

 

 

 

 

 

" 이 대화가 노동이 될래? 예술이 될래? 그게 자네에게 달려 있네. 책 나와보면 알겠지.

자네가 노동한 건지, 예술 한 건지. 쫄지마.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말을 나눴어.

내년 3월이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거야. 그때 책을 내라고. 살아 있을 때는 내지마.

살아 있을 때 내면 내가 멋쩍잖아. "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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