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써라, 그래야 존재할 것이다.
읽어라, 그래야 단어들은 살이 오르고 동사들은 피가 돌 것이다.
언어의 힘으로 무기력한 시간, 벌거벗은 공간, 존재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철학이고, 언어의 마법으로 나의 내면과 주변에서 스멀거리고 웅성거리고 솟구치는 욕망을 노래하는 것이 문학이라 생각합니다. '
- 송마나 선생의 <책을 내며> 시작 글에서부터 허리를 곧추세웠다.
《철학 수필 6권》을 펼치며 예감은 했지만 역시 철학과 문학의 어울림판이 놀이가 아닌 공부판이다. 올해의 공통주제는 '신神'이다. 느슨해진 정신을 일깨우고, 민무늬가 되어버린 감성에 파격의 획을 찾는다.
나는 시험볼 시기가 지나고서야 공부가 재미있어졌다. 공부를 놀이로 생각하지만 이번엔 빡셀듯 하다. 그래서 더 반갑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책과 작가들을 만나니 반갑다. 모르는 작가를 만나는 것은 더욱 반갑다. 또 몇 권의 책을 주문했다.
저력있는 작가들의 공력이 느껴지는 철학 수필에 경의를 보낸다.
* 우리가 살지 못한 나머지 인생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그럼으로써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불완전함을 돌아보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늘 새로운 판타지를 꿈꾸며 무료한 일상과 언뜻 자연스럽고 당연해보이는 일상의 삶에 대해 성찰할 수 있다.
페터 비에리가 자신의 수상록 《삶의 격》에서 모색한, 인간이 품격을 지키며 사는 지혜에 대한 문학적 대답이다. 아니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먼저 나왔으니 판타지에 대한 철학적 대답이라고 하겠다. 비에리에 따르면 품격을 지킴은 존엄성을 지킴인데 그는 서문에 적기를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는 삶이라는 것은 진정 무엇인가?", " 그 기대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고 했다. 그리고 비에리는 말하기를 존엄성은 균형이라고 적었다. (45쪽)
* 오에만큼 퇴고를 거듭하는 작가가 또 있을까? 그는 자신의 문학적 벙법 중 하나는 '차이를 가진 반복'이라고 언급한다. "새 작품을 시작하면 이미 쓴 작품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으로 다가갑니다. 같은 적과 다시 한번 싸우려고 애쓰는 거지요. 그 결과로 나온 초고를 계속 손질하고 퇴고합니다. 그러는 중에 옛날 작품의 흔적이 사라집니다. ..." (66쪽)
* 오에 겐자부로는 노벨상 강연에서 일본이 '전쟁포기 약속'을 했던 '헌법 9조'를 언급하며 한국, 중국 등 이웃나라에 저지른 과오를 기억하는 자신은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아름다운 일본의 나' (수상 연설 제목)에 목소리를 합할 수 없다면서 그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애매한 일본의 나'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그는 또한 노벨문학상 직후 천황이 직접 수여하는 문화훈장과 문화공로상의 수상이 결정되었을 때 '전후 민주주의자'로서 민주주의에 앞서는 어떤 권위나 가치관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상을 거절해벼렸다.
(70쪽)
* 어머니는 점을 치고 온 날에는 걱정이 더 많았다. 액을 막아야 한다며 집터 곳곳에 제물을 차려놓고 굿을 했으니까. 그래도 불행은 끊이지 않았다. 나의 신은 달랐다. 춤과 노래와 제수를 바라지 않았고, 두려운 대신 위로와 평화를 주었다. 창조주로서의 신을 믿으면서 이전까지 믿었던 모든 신을 미신으로 여기게 되었고,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니체는 인간이 지상에서 자유로운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99쪽)
* 톨레가 가르쳐주는 현존에 들어가는 방법의 하나가 '내맡김'이다. 내맡김은 '존재'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으로, 자신이 의식하고 생각을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인 '지금'의 힘으로 일이나 상황을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받아들이며 저항하지 않는 것이다. 단순히 포기하거나 단념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해 에고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개념화하여 반사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단지 느껴지는 감각을 알아차린다. 일어나고 있는 일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의식적으로 깨어 있는다. (168쪽)
* 그를 어떻게 애도할 자격이나 있나, 어떻게 이 상실의 슬픔을 표현할 수 있을지 몰라서 잠깐 생각을 멈춰보았다. 그때 옆에 두고 읽는 《도덕경》이 거울이 되어 내게 답을 보내왔다. 김민기, 그는 도道를 따라 살다간 성자聖者였다고. 성자가 우리 곁에 있었다는 때늦은 발견은 그를 잃은 슬픔보다 그를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다는 기쁨을 안겨 주었다. (172쪽)
* "퀼른 대성당이 탑꼭대기에 아직 기중기를 세워둔 채 미완성으로 남아 있듯이, 나의 고래학 체계도 미완성인 채로 남겨둘 작정이다. 작은 건물은 처음에 공사를 맡은 건축가가 완성할 수 있지만, 웅장하고 참된 건물은 최후의 마무리를 후세의 손에 맡겨두는 법이다."
멜빌은 이슈메일의 입을 빌려 고래의 분류학이 불완전하듯, 진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이라고 한다. 신이란, 진리란 궁극적인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208쪽)
* 텅 빈 듯 가득 차 있고, 상상 너머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말의 세계. 어쩌면 우리는 그 무문無門의 세계에 우리 스스로 문을 만들어 놓고 그 문이 열리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언어의 불명료성이나 오류조차도 자신의 자유 의지란 역발상으로 활용하며 즐기고, 소멸에 대한 손의 보복이 '끊임없이 글쓰기'라는 전복적 사고를 하는 시인 쉼보르스카. 문학을 향한 그의 저돌적이고 맹렬한 행보에 위축되었던 마음이 웅장해진다. (248쪽)
* "생명은 무엇인가요?"
"맹목입니다."
맹난자 수필가의 물음에 대한 고은 시인의 답변이다. 구구절절 설명을 넘어선, 해탈이다. 좁은 틈새를 비집고 어두운 땅속을 더듬어 내려갔을 저 제비꽃 뿌리처럼, 사람의 일생이라는 것도 결국은 맹목이다. 목표를 세우고, 분별하고 판단하여 그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깜깜이다. 먼눈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다. 무모하지만 용감하게. (250쪽)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 말씀과 "너희가 다 부처니라"는 부처님 말씀은 동일하며, 우주 속에 자연과 내가 바로 신이기에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인으로, 깨달은 자로 살아야 한다고 여긴다.
인생이란 내 안의 신을 모시는 길이다. 성령의 발현은 집중과 몰입에 '간절함'이라는 열쇠가 접속한 결과였다. (275쪽)
* 언어도단의 경지야말로 표현의 극점이라는 역설을 매 순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말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 작가다. 침묵은 선사禪師의 몫이고, 작가는 사유한 것을 말하는 사람이다. 침묵하면 꾸밈도 과장도 없다. 선사는 꾸며대는 연극배우가 아니어도 된다. 사유의 세계를 그대로 옮길 수 없는 고통은 작가의 운명이다. 이데아의 땅을 벙어리 냉가슴으로라도 그 '있음'을 표현해야 하는 사람이 작가다. 보르헤스는 구원 불가능한 이 고통스러운 세계에 자신이 갇혀있음을 뼈저리게 의식한 작가였다. 그 좌절이 '자기 자신의 글에 대한 낯설음' 아니었겠는가.
... ...
보르헤스의 영혼에 비친 우주의 크기는 그의 언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광대했을 것이다. 마침내 작가 보르헤스는 봉합될 수 없는 원초적 부조리 '보르헤스와 나'의 간극을 몸으로 받아들인다.
' 비록 과장하고 꾸며대는 그의 못된 버릇을 내가 익히 알고 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모든 것을 조금씩 양보하고 있다. 나는 나로서가 아니라 보르헤스로 남게 될 것이다.' (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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